잡다구리

나의 컴맹탈출기

황조롱이 2009. 10. 27. 12:26
1997년 초..

나는 군대를 공군에 갔었다. 1997년도 중반쯤에는 이미 병장을 달고 있을 무렵이었다.
더이상 오를 계급도 없고, 병장을 11개월이나 달고 있어야 하니..한참 지루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 시절이었다.

민주적인 지식 군대의  표상이었던 공군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대학다니다 온 친구들이 많았다. 지금이야 대학 너도 나도 갈수있는 시대이지만..나는 마지막 학력고사 세대였기 때문에...나름 대학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나와는 격이 다른 친구들이라는 막연한 거리감 같은게 있었다. 나는 고졸밖에 안되는, 그것도 체육고등학교를 나온..그 동네에서는 어찌보면 독특한 녀석쯤 되었을거다..다른사람들 눈에는....

그 무료하게 보내던 시절에 컴퓨터를 접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에 KBS 무슨 프로그램에서 강호동이 나와서 대학교마다 돌아다니며 무슨 게임을 하는데..거기에 컴퓨터에서 '애국가' 가사를 1분에 몇타를 치는가라는 유명한 섹션이 있었다.

아마도 컴맹인 나같은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비춰졌을 꺼다..

컴퓨터 잘하는 사람 = 컴퓨터 타자 빨리 치는 사람

당시 내무반 밑에는 작전 상황실이 있었다..비행기 스케줄을 관리하는 곳인데,그 곳에 컴퓨터가 한대 있었다.
일과가 끝나면, 항상 졸병들을 비롯하여 내 고참들까지 거기에 모여서 타자연습을 하곤했다.

그러면서 대화내용을 보면..무슨 파일이 어떻고, 뭘 엔터하고.. 몇타를 치네 200타를 치네 ..등등
IT의 태동기였는지 몰라도, 무슨 용어들을 쏟아내는데..내 귀에는 외계어일 뿐이였다.

처음에는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고, 컴퓨터라는 자체가 꼭 배워야 할 어떤 것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런데 날이가면 갈수록 컴퓨터에 대한 용어를 가지고 대화를 많이 하는게 아닌가..부팅이 어쩌고, 무슨 프로그램이 어떻고....-.-

왠지 나만 모르는 것 같은 분위기가 되어서야 그 컴퓨터라는 것을 찬찬히 옆에서 보게 되었다.
처음에 켜지면 무슨 영어들을 까만화면에 막 쏟아내다가 나중에 뭔가가 껌뻑거렸다. 그러면 졸병녀석이 뭔가를 막 치고 뭐를 누르면 파란 화면이 떴다. 그리고 거기서 화살표 키로 차례로 누르다 무슨 칸에서 뭘 누르면 그 유명한 한메타자가 나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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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프로그램 한메타자교사

내가 처음 접한 컴퓨터 광경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옆에서 보다가, 넌지시..'!야 나도 알려주봐봐' 하면서 졸병녀석을 하나 붙잡고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당연히 처음에는 타자연습이었다. 타자연습하는 것 자체도 어려웠지만, 나는 이상하게 왜..저 파란화면에서 많이 보이는 저것들 중에 왜 꼭 이 하나만 선택해서 엔터를 쳐야할까? 그게 제일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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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내가 봤을 그 화면으로 추정되는(?) 그때의 도스 프로그램 Mdir-III

말도 못하고 며칠간 그 녀석이 알려준 순서대로 항상 그렇게 들어가서 프로그램을 실행시키고 타자연습하기를 며칠..나중에 좀 컴과 친해졌다 싶을때 용기내어서 그 졸병녀석에게 물었다.

야...근데 내가 엔터치는 이 파일말고 다른 주위에 있는 파일들은 대체 뭐냐?

아..그랬더니..이 놈이 ' 네 그게 말입니다..무슨 실행파일이 어떻고, bat파일 어떻고' 하면서 막 쏟아내는데...이게 뭔소린지...ㅎㅎㅎ
처음에는 이해하는척 듣다가 그렇게 하루가 갔다.

그런데 머리속에는 계속 그게 맴도는 거다...대체 왜....꼭 그놈만 왜 엔터를 쳐야하냐고!...

한 이틀후에 청소시간에 그 녀석을 다시 불렀다..그러면서 다시 그 질문을 했다..'요것들이 뭐라고?..'
하니깐, 이 녀석 얼굴이 어쩔줄을 몰라했다...그러면서 저번과 같은 똑같은 말...ㅎㅎㅎ..
그때 옆에서 보던 내 한달위 고참이 (이 분은 그 상황실에서 그 컴퓨터를 다루는 분) 웃으면서 하는 말..

하하~ 야.. 박병장에게 그렇게 말하면 알아듣겠냐....하면서 잘 들어봐...
니가 엔터를 치면 실행되는 게 실행파일이라는 거야..근데 얘는 사람으로 따지자면 머리속의 뇌같은 거야..나머지 보이는 파일들은...팔,다리, 몸통, 몸속의 장기들, 눈,귀,코 등이고...그런데 팔에다가 '야 팔과 다리를 움직이게 해라' 하면 못 알아듣겠지? 당연히 뇌에다 명령을 내려야 뇌가 알아듣고 팔, 다리를 움직이겠지?...구조가 그렇게 되어있어..현재 보이는 이것들이...

그때서야 난 이해가 되었다...아 그렇구나..
내가 만약 그때 그고비를 넘기지 못했다면, 현재 나는 컴퓨터와 별로 친하지 못했을 거다.

그리하여 제대하고..시간이 흘러 컴퓨터와 친구가 되었고,  현재..웹프로그래머로 밥먹고 산다.나이는 많이 먹었지만, 아직도 그때 생각하면, 뭔가를 알고자 하는 욕구...그 기본을 알고자 하는 욕구가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왠지 모를 추억에 젖곤 한다.

그리고 지식습득의 책을 사게 되는 경우가 있을땐, 난 항상 그때 그 고참의 말처럼,
어려운 용어보단, 딱 내가 이해되는 수준의 책을 산다. 대충 쉽게보이는 척 하는 책도 있을 것이고, 지식자랑을 하는 것처럼 어렵게 보이는 책들도 있다. 그런데 찬찬히 찾아보면, 아무런 욕심없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쉽게 풀이하여 진심으로 전달하려고 하는 책들도 있다.
많은 컴퓨터 책들을 보다보니, 그런게 느껴지는 수준이 되었다.ㅎㅎ(물론 사놓고 안보게 된 컴퓨터 책도 책꽂이의 다수를 차지한다..ㅠㅠ)

창업을 꿈꾸고 있는 지금.....옛날 순수했던 저 컴맹시절로 돌아가서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면서 희망을 키우고 싶다. 그리고 컴맹을 탈출하듯이,..창업 성공의 열매도 맛봤으면..^^